시간을 초월한 사랑
더 비스트는 시간이라는 선형적 개념을 파괴하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랑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1910년 파리, 2014년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2044년의 미래 사회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각 시대는 동일한 두 인물, 가브리엘과 루이즈를 중심으로 재구성되며, 그들의 관계는 전생처럼 반복되지만 그 끝은 언제나 비극적으로 향한다. 이처럼 반복되는 운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 타고난 본성과 감정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은유한다. 1910년대는 초기 산업화와 계급 구조의 굳건함 속에서 여성의 억압과 선택의 한계를 조명한다. 이 시기의 루이즈는 억눌린 감정과 욕망을 지닌 인물로 등장하고, 그녀의 감정은 결국 파국을 불러온다. 반면 2014년은 디지털 시대의 고립과 인간관계의 파편화를 보여주며, 이 시기의 루이즈는 더 강인하지만 내면에 깊은 외로움을 품고 있다. 그리고 2044년, 영화는 감정을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이 보편화된 미래를 제시한다. 이 미래의 루이즈는 감정을 제거하고자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사랑과 불안을 꿈속에서 마주한다. 이러한 서사 방식은 단순히 평행 세계나 환생이라는 소재를 넘어, ‘감정’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세 시대를 통합한다. 루이즈는 시대를 달리해도 동일한 본능과 불안을 반복하며, 사랑 또한 이성으로 통제되지 않는 힘임을 드러낸다. 영화는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원형적 감정인 사랑과 두려움, 욕망이 시간과 문명을 초월해 반복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처럼 더 비스트는 시간이라는 틀을 파괴하고, 사랑과 감정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공간적 실험을 통해 관객에게 강렬한 정서적 체험을 선사했다.
인간성의 경계에 선 존재들
영화는 이 설정을 통해 "감정 없는 인간은 과연 인간일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루이즈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감정이라는 요소가 삶에 고통을 안긴다고 믿고,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려 한다. 그녀의 선택은 우리가 종종 느끼는 감정의 무게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대변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대가가 무엇인지를 끝내 보여준다. 감정을 제거한 루이즈는 불안도, 상처도 느끼지 않지만, 동시에 진정한 기쁨이나 사랑조차 경험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녀는 과거의 감정을 지워버렸다고 믿지만, 꿈속에서는 여전히 가브리엘의 형상이 나타나고, 반복되는 사랑과 이별의 장면이 그녀를 괴롭힌다. 이는 기술이 인간의 감정을 지우는 것이 가능한 듯 보여도, 무의식의 깊은 곳까지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간의 본질이 단순한 이성적 판단이나 기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로 제시된다. 가브리엘 역시 각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마주하고 반응한다. 그는 1910년대의 순수하고 무력한 청년, 2014년의 흔들리는 중년 남성, 그리고 미래에서는 감정 없는 사회에서조차 어떤 잔향처럼 남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감정으로 규정된 존재임을 반복해서 드러내며, 이 감정이야말로 존재의 흔적이자 증거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정을 제거한 사회의 평화와 안정은 겉보기에만 완전하다. 루이즈의 선택은 오히려 더욱 깊은 고립과 무의식 속 혼란을 불러왔고, 영화는 이를 통해 우리가 외면하려 하는 고통조차 인간성의 일부임을 말하고 있다. 더 비스트는 기술의 발전과 인간 본질 사이의 간극, 그리고 우리가 끝내 버릴 수 없는 감정의 근원을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파고들며 감정 없는 세상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했다.
자아를 구성하는 감정의 잔재
더 비스트는 루이즈라는 한 인물의 세 가지 생을 통해,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비선형적인 내러티브 안에서 탐색한다. 이 영화가 특별한 점은, 시간을 단순히 선형적 흐름으로 보지 않고, 감정의 응축과 기억의 파편이 자아의 중심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세 시대 속의 루이즈는 외형적으로는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그녀를 관통하는 어떤 정서의 ‘잔재’들이 일관되게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곧, 우리가 겪은 경험과 감정이 의식적으로는 잊혀져도 무의식 속에 남아 자아의 본질을 끊임없이 구성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루이즈는 1910년대 파리에서는 불안과 사랑, 좌절 속에 침몰해가는 여인이었고, 2014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사회에 대한 냉소와 회의,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 속에 살아갔다. 그리고 미래 사회에서는 감정을 제거한 채 살아가려 하지만, 여전히 반복적으로 같은 얼굴과 상황이 꿈처럼 찾아온다. 이것은 마치 그녀가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한 감정의 미로 안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처럼 영화는 시간의 순서를 따라가기보다, 감정과 기억이 주도하는 순환 구조를 통해 ‘자아’라는 존재가 고정된 것이 아닌 끊임없는 재해석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감정을 제거하더라도, 사랑하거나 상처받았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곧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단지 생물학적, 사회적 조건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정서적 반응이 쌓여 만들어지는 다층적인 구조라는 것을 드러낸다. 루이즈가 매번 같은 인물을 마주하고, 유사한 감정의 흐름을 겪는 이유는 그녀의 자아 깊숙이 그 감정들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기억과 감정을 통해, 인간 존재는 고통조차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의 유적지’ 위에 서 있다는 섬세한 통찰을 전한다. 감정을 지우는 기술이 존재한다 해도, 인간의 ‘감정의 잔재’는 완전한 삭제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파동처럼 존재하며, 결국 자아를 증명하고 존재를 지속시키는 가장 본질적인 증거가 된다. 《더 비스트》는 기억과 감정의 반복이라는 영화적 구조 안에서, 인간이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결국, 감정을 지우려는 시도마저 인간이기에 가능한 선택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감정과 기억이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를 정교하게 들여다본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