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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 "역사를 바꾼 총성과 셀룰로이드"

by manymoneyjason 2025. 4. 25.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 "역사를 바꾼 총성과 셀룰로이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

서사의 유희와 권력의 전복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늘 장르의 규칙을 전복하고, 서사의 경계를 교란하며 관객에게 도발적으로 말을 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담한 시도를 펼친 작품으로, 나치 독일의 패망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타란티노 특유의 대체 역사 서사로 비틀며 새로운 방식의 ‘복수극’을 완성했다. 이 영화에서 히틀러는 실제와 달리 영화관에서 무참히 살해당하고, 전쟁의 종결은 연합군이 아닌 ‘바스터즈’라는 일군의 비정규 전사들과 유대인 여성 쇼샤나의 손에 의해 그려진다. 타란티노는 이러한 역사 왜곡을 통해 단순한 픽션을 넘어선 예술적 선언을 펼친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력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상상력을 통해 권력의 전복을 꿈꾸며, 억압자에게 철저히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설계한다. 나치 고위 장성들을 조롱하고, 히틀러를 폭력적으로 살해하며, 극장에서 울려 퍼지는 유대 여성의 웃음은 단순한 복수가 아닌 ‘기억의 재편’을 상징한다. 이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수동적인 방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능동적으로 과거를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기도 하다. 타란티노는 이 모든 복수의 서사를 장르적 유희 위에 얹는다. 챕터로 나뉘는 구성은 고전 소설을 연상케 하며, 각 장마다 독립적이면서도 전체 플롯과 정교하게 맞물리는 기계장치처럼 작동한다. 챕터 1에서 시작되는 ‘우유 농가’ 장면은 조용하면서도 처절한 서사적 긴장을 만들고, 이어지는 챕터들 속에서는 블랙 코미디와 서부극, 전쟁영화의 문법이 교차한다. 그 안에서 타란티노는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목소리들’을 영화라는 방식으로 되살려낸다. 또한 영화는 단순히 전개나 결말의 파격뿐 아니라,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방식’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인물들이 스스로를 연기하고,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카메라의 시선이 진실과 거짓 사이를 유영하는 장면들은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시키면서도, 바로 그 지점에서 감정적 진실을 건드린다. 실제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에서 오히려 더욱 강력한 감정적 해방이 이루어지는 이 지점이 바로 타란티노의 천재성이다. 이처럼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역사적 복수극이 아니라, 기억을 재구성하는 예술적 선언이다. 타란티노는 현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억압된 과거에 일종의 ‘영화적 정의’를 부여한다. 영화는 가짜이지만, 그 안의 정의는 진짜처럼 울린다. 이 아이러니가 타란티노가 남긴 가장 강렬한 발언이다.

 

언어, 긴장, 그리고 시네마

영화의 첫 장면, 우유 농가에서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 대령이 등장하는 장면은 이러한 언어적 긴장감의 절정을 보여준다. 란다는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그가 말할 때마다 상호작용이 변화한다. 이 장면에서 그는 세심하게 단어를 고르며, 자신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언어로 말을 이어간다. 그는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냐”라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을 압박하면서 계속해서 언어의 경계를 넘나 든다. 이 대화는 끝없이 반복되는 말장난 같지만, 그 안에서 란다는 인간 심리의 본질을 꿰뚫고,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창출한다. 또한 타란티노는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말의 힘’을 인식시킨다. 예를 들어, 술집에서 벌어지는 유명한 대화 장면에서는 언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타란티노는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이 장면을 끊임없이 확장시킨다. 캐릭터들이 말을 주고받는 동안 시청자는 그들이 내뱉는 단어들 속에 숨겨진 의도와 숨겨진 감정을 파악하려 애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들의 언어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국적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에서, 이 언어의 차이는 그 자체로 심리적, 정치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한편, 타란티노는 언어를 단순히 대화의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영화적 장치로 변형시키고, 긴장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을 통제한다. 영화 속에서는 여러 개의 긴 대화가 이어지지만, 결국 그 모든 말들이 사라지거나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끝나게 된다. 예를 들어, 술집에서의 ‘바스터즈’ 팀과 나치 군인들의 대치 장면에서, 긴 대화가 전개될 때마다 촉발되는 숨막히는 순간들이 관객에게 더욱 강한 감정을 일으킨다. 이 장면에서는 누군가 말할 때마다 죽음이 다가오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타란티노는 이러한 언어의 효과를 통해 폭력과 권력의 상징적 표현을 만들어낸다. 타란티노는 이렇게 언어로서의 긴장감을 극대화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복잡함과 다층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각 캐릭터가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가 만들어내는 에너지, 긴장, 그리고 결국 파국적인 결말은 모두 철저히 계획된 시네마적 전략이다. 말은 그 자체로 공포를 만들어내고, 타란티노는 이를 통해 그의 영화 속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를 훨씬 더 강화한다.

 

영웅도 악당도 아닌, 복수의 서사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타란티노는 복수극을 그리면서도 전통적인 영웅과 악당의 구도를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복수와 정의를 향한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그들의 행위는 전통적인 선악의 이분법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이는 타란티노가 그려내는 복수극의 특징 중 하나로,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은 모두 일종의 ‘회색지대’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샤를로트’ 역할의 쇼샤나(메란다 바커)는 나치에 의해 가족을 잃고, 그 복수를 극장에서 이루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한 복수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타란티노는 쇼샤나가 복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심리적 갈등을 깊이 있게 그려내며, 관객이 그녀의 선택을 온전히 지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그녀는 그저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의 싸움을 벌이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의 결단이 결과적으로 히틀러와 나치의 종말을 초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한편,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은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그가 나치는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본질적으로 그는 상식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란다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필요할 때는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이처럼 란다는 타란티노의 손에서 ‘악당’으로 그려지면서도, 그 악당을 단순히 전형적인 나쁜 놈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그는 극 중에서 한편으로 관객을 웃기기도 하고, 고전적인 악당의 특성을 넘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복수극에서 ‘복수’가 단순히 선악을 넘어서는 지점은 타란티노가 보여주는 또 다른 차별화된 점이다. 영화 속에서 복수의 대상은 나치일 뿐만 아니라, 각 인물이 개인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감정적, 심리적 복잡함이다. 이 복수극은 단순히 사건이나 역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각 캐릭터의 내면적 성장과 싸움을 그린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샤를로트, 란다, 그리고 ‘바스터즈’의 일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복수라는 목적을 이루려 하지만, 그들의 방식은 절대로 단순한 정의 구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도덕적 경계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가야 한다. 결국 타란티노는 이 복수극을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나치의 악행을 복수하는 캐릭터들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타락하거나, 때로는 의도치 않게 ‘악’을 저지르는 모습은 복수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타란티노는 복수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의 심리적 복잡성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도덕적 혼란을 치밀하게 탐구하며,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복잡한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