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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일즈맨 “무너진 무대 위의 진실”

by manymoneyjason 2025. 4. 20.

영화 세일즈맨(2016) “무너진 무대 위의 진실”
세일즈맨

1. 죽은 자의 집에서 살아가기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항상 이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들여다보며, 개인의 일상 안에 숨겨진 불안을 섬세하게 포착해 내는 연출로 알려져 있다. <세일즈맨> 역시 표면적으로는 한 부부의 사소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거대한 사회적 균열과 억압이 놓여 있다. 영화는 테헤란의 아파트 붕괴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감독이 이란 사회의 불안정성과 붕괴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는 시각적 장치다. 마치 연극 무대 위에 세워진 세트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안정되어 보였던 삶 역시 예고 없이 뒤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에마드와 라나는 곧 다른 집으로 옮겨야 하고, 그 집은 이전에 성매매 여성이 거주하던 공간이다. 감독은 이 ‘죽은 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을 통해,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를 잠식해 들어오는 공간적 긴장감을 형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지 폭력 사건의 여파가 아니라, 그 공간을 둘러싼 침묵과 감추어진 진실들이 인물들의 감정 안에 어떻게 쌓이는가이다. 테헤란의 재개발로 인한 이주, 낯선 공간 속의 불안, 주변 이웃의 무관심까지 모두 이란 현대 사회의 이면을 조명하며, 감독은 도시라는 익명성 속에서 인간관계가 얼마나 쉽게 단절되고 왜곡되는지를 보여준다. 감독은 시종일관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교묘하게 흐린다. 일상의 공간은 무대 같고, 무대는 또 하나의 현실처럼 보인다. 이런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진짜 ‘위협’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세일즈맨>은 단순히 범죄와 복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던지며, 사회 전체가 만든 불안의 구조를 서서히 해부해가는 영화다.

 

2. 분노의 연극, 침묵의 현실

폭력 사건이 발생한 이후, <세일즈맨>은 단순한 피해자의 이야기를 넘어, 부부 관계 내부의 보이지 않는 균열과 감정의 흐름을 정교하게 파고든다. 라나가 샤워 중 누군가에게 습격당한 이후, 그녀는 눈에 띄게 위축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루는 에마드의 태도는 단순한 위로나 공감에서 벗어나 점차 ‘복수’와 ‘해결’이라는 남성적 행동 코드로 기울어간다. 그는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하고, 범인을 찾으려 하며, 그 과정에서 아내의 감정적 요구나 침묵을 놓치게 된다. 여기서 파르하디 감독은 매우 민감한 지점을 건드린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이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다시 침범하게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라나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다시 꺼내고 싶어하지 않고, 심지어 범인을 처벌하려는 남편의 태도에서조차 또 다른 위협을 느낀다. 에마드는 점점 집착에 가까운 태도로 범인을 추적하고,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줄어들고 침묵은 깊어진다. 이 침묵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균열 속에 머무르는 부부의 상징으로 읽힌다. 감독은 이러한 감정의 누적을 연극 리허설 장면과 병치하여 표현한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속 윌리 로먼과 그의 가족 이야기에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개인의 자존감과 실패의 고통이 담겨 있는데, 이는 곧 에마드의 감정 상태와 정확히 연결된다. 그는 정의와 복수를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까지 폭력적 정의를 강요하려 한다. 영화 후반부, 에마드가 범인을 마주했을 때, 그가 선택하는 행동은 단죄이기보다는 일종의 감정의 표출이며, 이는 곧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의 발현이다. 파르하디는 이를 통해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결국 개인의 감정에 휘둘릴 수 있으며,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에마드의 선택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고, 관객은 누구도 완전히 공감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심리적 회색지대 속으로 끌려들게 된다. 결국 <세일즈맨>은 폭력 이후의 복원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그리고 진정한 이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작품이다.

 

3. 무대와 삶 사이, 끝나지 않은 연극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세일즈맨>에서 ‘연극’이라는 장치를 단순한 배경 요소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삶과 무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흐리며,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과 감정의 균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도구로서 연극을 끌어들인다. 영화 속에서 에마드와 라나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 출연 중인데, 이 희곡이 지닌 몰락한 가장의 자존심, 가족 간의 불신, 좌절된 꿈이라는 테마는 영화 속 부부의 현실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감독은 이 희곡을 단순히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 속 대사와 감정이 실제 인물들의 삶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교차 편집을 시도한다. 특히 에마드가 무대 위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현실 속 그가 감정을 억누르다 결국 폭발하는 순간과 겹쳐지며, 관객에게 묘한 불안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처럼 <세일즈맨>은 연극이라는 허구 속에서 오히려 현실의 감정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거울의 장치’를 택한다. 이 영화의 핵심적 몰입을 이끌어낸 배우들도 빼놓을 수 없다. 에마드 역의 샤하브 호세이니는 이미 파르하디의 전작 <어바웃 엘리>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로, 이번 작품으로 2016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연기는 감정의 층위를 섬세하게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분노와 혼란, 슬픔이 순차적으로 쌓여가는 내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라나 역을 맡은 타라네 알리두스티 역시 폭력 이후의 공포와 무력함, 동시에 남편의 반응에 대한 당혹감을 눈빛 하나로 표현하며 관객의 감정을 붙잡는다. 흥미로운 비하인드로는, 감독이 두 배우에게 시나리오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달하지 않았고, 주요 감정 장면 직전에만 대본의 핵심 내용을 알려줬다는 점이 있다. 이는 감정의 즉흥성과 진정성을 유도하기 위한 방식으로, 배우들이 실제로 혼란과 충격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한 연출 전략이다. 또한, 사건 이후 두 인물이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설정 역시 일부러 대본에서 대사를 줄이며 만들어낸 긴장감으로, 감독은 그 ‘침묵’ 자체가 말보다 많은 의미를 전달하도록 의도했다. <세일즈맨>은 이처럼 무대와 현실이 맞닿는 경계에서 인간의 도덕, 감정, 사회적 역할에 대해 묻는 작품이다. 파르하디 감독은 연극의 허구성과 삶의 진실을 교차시키며, 우리가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의 불일치를 탁월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배우들의 진실된 연기와 감독의 치밀한 연출이 만들어낸 심리적 무대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