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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경계, 도덕의 아이러니" 영화 더 스퀘어(2017)

by manymoneyjason 2025. 4. 18.

"예술의 경계, 도덕의 아이러니" 영화 더 스퀘어(2017)
더 스퀘어(2017)

‘더 스퀘어’의 공간, 윤리와 책임이 시험받는 무대

더 스퀘어는 단지 영화 제목일 뿐만 아니라, 극 중 설치 미술 작품의 이름이기도 하다. “더 스퀘어”는 한 박물관 앞 광장에 설치된 정사각형의 공간으로,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대우받고, 타인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가상의 규칙이 붙는다. 얼핏 보면 단순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공공 예술로 보이지만,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이 설치 미술을 통해 인간의 윤리적 선택과 사회적 위선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이 사각형의 공간은 인간의 도덕성을 실험하는 무대다. 누군가 이 공간에 들어와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는 정말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영화는 이 단순한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진다. 등장인물들은 종종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망설이거나, 아예 외면한다. 박물관 관장인 크리스티안 역시 사회적 책임을 외치는 전시의 주체이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이중적이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 가방을 도둑맞은 후 아이들에게 경고 편지를 무작위로 뿌리는 장면은, 그의 윤리적 판단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감정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다. 더불어 이 공간은 ‘기호’로서의 예술이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도 비판한다. 설치 미술을 둘러싼 전시 공간, 홍보 영상, 관람객의 반응 등은 일종의 연극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이 공간이 내세우는 가치를 ‘체험’하되, 결코 실천하지 않는다. 예술은 이상을 말하지만,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왜곡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루벤 외스틀룬드는 예술의 진정성,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맥락에서 얼마나 쉽게 소비되고 희화화될 수 있는지를 고발한다. 또한 영화는 다양한 계층과 인종, 젠더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광장의 평등이라는 개념이 실제로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드러낸다. 부유하고 세련된 예술계 사람들과 거리의 홈리스들, 그리고 박물관을 방문하는 다양한 군상들은 그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묵인하고, 외면한다. “더 스퀘어”는 이상적인 윤리의 장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히려 인간의 본능과 위선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실험실이다. 결국 이 정사각형은 하나의 함정이 된다. 도덕과 예술, 책임과 무관심, 실천과 연출 사이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가 ‘선함’을 말하는 순간조차 얼마나 위선적일 수 있는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묻는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당신은 정말 움직일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사각형의 테두리 안에 서게 된다.

 

감독의 시선, 불편함을 예술로 만드는 연출

더 스퀘어는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특유의 연출 방식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그는 언제나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 시스템을 날카롭게 해부해 왔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 특성이 더욱 거침없이 발현된다. 외스틀룬드는 더 스퀘어를 통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미화하며, 또 얼마나 자주 진실을 외면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가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불편함이다. 이 영화에는 관객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심지어 얼굴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장면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프닝 갈라 디너에서 벌어지는 ‘원숭이 남자’ 퍼포먼스다. 이 장면에서 배우 테리 노타리가 실제로 침팬지의 움직임을 본떠서 연기하며, 상류층 관객들을 위협하는 이 퍼포먼스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 굴복하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며, 무리 속에서 침묵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메타포다. 이는 단지 예술의 경계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도덕적 허울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연출이다. 외스틀룬드의 연출은 종종 장면을 의도적으로 길게 끌어간다. 인물의 말과 행동 사이의 공백, 난처한 침묵, 사회적 긴장감이 화면 안에서 팽팽하게 유지된다. 이 같은 리듬은 상업 영화의 전형적인 편집법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연극 무대를 지켜보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장면은 언제 끝날까?’라는 심리적 불편을 유도하며, 그 틈에서 우리의 내면과 마주하게 만든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그렇게, 불편함을 통해 진실을 끌어올리는 방식을 택한다. 또한 감독은 블랙코미디의 장르적 문법을 빌려 사회 풍자를 전개한다.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사건들, <예컨대 예술품을 치우다 진짜 작품을 청소해 버린 청소부, 유튜브 바이럴 영상을 둘러싼 논란 등>을 연이어 보여주며, 예술과 미디어, 도덕과 마케팅이 얼만큼 뒤엉켜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하지만, 그 웃음은 대개 불편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씁쓸함을 남긴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일관되게 사회적 아이러니를 극대화하는 연출을 선호한다. 그는 인간의 본능과 사회적 제도의 충돌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 틈에서 웃음과 공포를 동시에 끌어낸다. 더 스퀘어는 그가 만든 가장 날카로운 해부도 중 하나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웃는 이유는 단순히 유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웃음은 우리 스스로가 속물적인 예술의 소비자, 무관심한 방관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터지는 자기반성의 신호에 가깝다.

 

주인공 크리스티안의 몰락, 현대 사회의 자화상

더 스퀘어의 중심에는 현대 미술관의 관장 ‘크리스티안’이 있다. 그는 세련되고 매너 좋으며, 사회적 영향력도 갖춘 이상적인 지식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그의 외면 아래 숨겨진 이기심과 위선, 무책임함이 하나씩 드러난다. 크리스티안은 그 어떤 폭력도 직접 저지르지 않지만, 바로 그런 ‘행동하지 않음’으로 인해 윤리적 책임에서 점점 멀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가방을 도둑맞고 나서 이성을 잃고, 무작위 아파트에 협박장을 뿌리며 오히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다. 이후 그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려 할 때조차, 상황은 이미 그를 용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 일련의 사건은 단지 개인의 실수나 분노 조절 실패의 문제가 아니다. 감독은 이를 통해,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쉽게 도덕적 경계를 넘나드는지를 보여준다. 크리스티안의 몰락은 단순한 인물의 추락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윤리와 책임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해졌는가에 대한 통찰이다. 영화 후반, 크리스티안은 광고 논란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며 사과문을 녹음하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이상화하는 인물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공공의 책임이라는 개념이 실은 얼마나 표면적이고 기계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예술과 도덕, 책임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지만, 정작 위기 앞에서는 자기 보호에 급급하다. 이처럼 크리스티안은 거울 속의 우리 자신과도 같다. 누군가를 돕는 ‘척’을 하고, 정의를 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중성은 바로 현대인의 초상이자,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간의 전형이다. 배우 클라에스 방은 이러한 복잡한 내면을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연기해낸다. 그의 표정은 종종 냉철함과 당황스러움 사이를 오가고, 행동은 매너와 무책임 사이에 놓여 있다. 그는 이중적인 캐릭터를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혼란과 무력감을 공감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기는 루벤 외스틀룬드의 디렉팅과 맞물려, 인물이 단순한 풍자 대상이 아닌 현대 사회의 복합적 정체성을 품은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결국 더 스퀘어는 크리스티안의 몰락을 통해 묻는다. “우리의 정의감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영화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질문 자체를 관객에게 돌려주며, 당신은 과연 ‘그 사각형 안’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이 불편한 질문이야말로, 더 스퀘어가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