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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불꽃처럼 피어난 사랑의 기억

by manymoneyjason 2025. 4. 16.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불꽃처럼 피어난 사랑의 기억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침묵의 미학, 시선으로 말하는 사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언어보다 시선과 정적 속에서 더욱 깊이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감독 셀린 시아마는 이 영화를 통해 "남성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난, 완전히 여성의 시선으로 사랑을 그려내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 ‘예술이 감정을 어떻게 담아내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사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시아마는 인물 간의 눈빛, 고요 속의 긴장, 그리고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깊은 감정선을 직조해 나간다. 영화의 대부분은 정적이며 침묵이 흐르지만, 그 속에는 말보다 더 강렬한 교감이 오간다. 시아마는 또한 관객이 ‘관찰자’로 존재하지 않도록 철저히 구성했다. 전통적인 영화에서 남성 시점의 카메라가 여성 인물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저항하기 위해, 그녀는 관객이 마리안느의 시선을 따라 엘로이즈를 바라보게 만든다. 이것은 단지 촬영기법의 변화가 아니라,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 자체의 전환이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우리는 여성이 욕망하는 주체로서 그려지는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며, 이 영화가 그러한 공백을 메우는 하나의 시도라고 밝혔다. 영화 속 엘로이즈는 단순히 사랑받는 대상이 아니라, 동시에 사랑하고 기억되는 주체로 존재한다. 그녀의 시선 역시 마리안느를 똑같이 응시하고 있으며, 이중적 시선은 결국 ‘관찰과 기억’이라는 영화의 중심 테마로 이어진다. 이 사랑은 누군가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놓인 감정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피어나고 타오르다 사라지는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사랑이 얼마나 조용히, 그러나 격렬하게 다가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기억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불타는 초상, 예술과 욕망의 경계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말 그대로 ‘한 인물을 그려내는 과정’을 중심에 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초상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형상이며, 욕망의 흔적이고, 동시에 기억을 봉인하는 매개체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회화의 기술적 완성을 향한 여정인 동시에, 엘로이즈의 감정, 자아, 그리고 그녀가 감춰온 욕망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깊은 탐색의 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두 여성이 서로를 점점 더 자세히 ‘관찰’하고, ‘응시’하고, 그 시선 속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과정을 정교하게 쌓아간다. 감독 셀린 시아마는 이미지와 프레임을 통해 감정의 서사를 조형하는 데 탁월하다. 이 영화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빠른 전개 대신, 응시와 그림이 중심이 되는 비언어적 장면들이 많다. 특히 엘로이즈가 처음으로 마리안느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장면이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보다 점점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들은, 시선을 통한 감정 교환이 얼마나 극적인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그림이라는 ‘보는 행위’ 자체가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 욕망은 결국 예술이라는 형태로 남겨진다. 미장센 역시 이 영화의 감정을 시각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어두운 저택 안의 침묵, 해안가의 거센 바람, 어슴푸레한 빛이 퍼지는 촛불 아래의 장면들은 모두 인물의 감정 곡선을 따라 설계된 것이다. 특히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엘로이즈가 불꽃에 둘러싸여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순간은, 사랑이 타오르는 감정으로서 형상화된 장면이자, 이 영화의 정체성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로 남는다. 이 장면은 영화적 회화이자, 회화적 영화 그 자체다. 결국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이 사랑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동시에 덧없을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그린다’는 행위는 사랑하고 기억하고 떠나는 모든 감정의 기록이며, 그 경계에서 예술과 욕망은 조용히 겹쳐진다.

 

화면 너머의 진심, 연기와 비하인드 스토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감정을 이토록 생생하고 진실하게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주연 배우 노에미 멜랑(마리안느 역)과 아델 에넬(엘로이즈 역)의 섬세한 연기 덕분이다. 이 영화는 사랑을 직접 말로 고백하거나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의 눈빛, 숨결, 손끝의 떨림 같은 디테일한 표현으로 감정을 전한다. 특히 아델 에넬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복잡한 내면을 눈빛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점차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점진적으로 그려낸다. 반면 노에미 멜랑은 외적으로는 침착하지만 내면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절제된 방식으로 보여주며, 인물의 고독과 열망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 두 배우는 단순한 연기 이상의 교감을 화면 속에서 나눈다. 실제로 셀린 시아마 감독과 아델 에넬은 촬영 당시 연인이었으며, 시아마는 이 영화가 “엘로이즈를 위한, 엘로이즈에 대한 초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작품은 단지 서사 속의 사랑 이야기일 뿐 아니라, 감독의 실제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러브레터였던 셈이다. 아델 에넬 역시 촬영 내내 마리안느라는 인물이 감독의 시선을 대신한다고 느꼈다고 언급한 바 있으며, 이 때문에 영화는 더욱 강렬하고 솔직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었다. 또한 두 배우는 촬영 당시 많은 장면에서 리허설 없이 즉흥적으로 감정을 주고받으며 연기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배우들의 실제 관계와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이었다. 특히 마지막 오페라 장면에서 엘로이즈가 눈물을 흘리는 클로즈업 장면은 단 한 번의 테이크로 촬영되었고, 아델 에넬이 실제로 음악에 몰입해 흘린 눈물이라고 한다.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이 영화 전체의 정서가 응축된 순간이었다”라고 말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력과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감정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다. 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마음 속에 오래도록 남는 이유는, 단지 이야기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심이 투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연기가 아닌 감정, 연출이 아닌 공감으로 완성된 영화. 그것이 이 작품이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다.